
주말에 가로수길을 걷다 보면 묘한 기분이 듭니다. 사람은 여전히 많은데, 어딘가 낯선 느낌이랄까요. 저도 한때 이 거리에서 옷가게를 운영했습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거리의 생김새는 비슷한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핫플레이스가 되는 조건, 일반적 믿음과 실제의 차이

일반적으로 상권이 뜨려면 교통이 좋아야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상권 분석에서 유동인구(Floating Population)는 가장 기본적인 지표입니다. 여기서 유동인구란 특정 지역을 통과하거나 방문하는 사람의 수를 말하며, 상권의 잠재적 매출 규모를 가늠하는 첫 번째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교통이 편리한 역세권은 서울 안에만도 수십 군데입니다. 그 중 핫플레이스가 된 곳은 손에 꼽히죠.
제가 가로수길에서 장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 거리는 성수동보다 더 '힙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대기업 브랜드 대신 개성 있는 편집숍, 로컬 디자이너 브랜드, 감각적인 카페가 거리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주말이면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저도 내심 "이 거리는 계속 잘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확신은 틀렸습니다.
상권 전문가들이 말하는 핫플레이스의 필요조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지하철역 접근성, 혹은 하루 1만 명 이상의 승하차 인원
- 상주인구 또는 주거인구 등 기본 수요를 뒷받침하는 고정 인구
- 헤리티지(Heritage) 또는 앵커 시설의 존재
여기서 헤리티지란 특정 지역에 오랫동안 축적된 문화적 자산 혹은 집객 시설을 뜻합니다. 신당동 떡볶이 골목, 익선동 한옥, 동묘의 빈티지 마켓이 모두 이에 해당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 세 가지만 갖춰지면 상권이 산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경험해 보니 이건 '뜰 상'을 판단하는 기준이지, 그 상권이 오래 지속된다는 보장이 아니었습니다.
국내 자영업자 수는 약 550만 명에 달하며, 전체 취업자의 약 20%를 차지합니다(출처: 통계청). 이 많은 분들이 창업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게 상권인데, 막상 상권의 흥망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콘텐츠는 드물다는 게 솔직히 의아했습니다.
퍼스트무버가 만든 상권에서 퍼스트무버가 쫓겨나는 구조

가로수길이 무너진 진짜 이유를 말하기 전에, 먼저 이 거리를 만든 주인공들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소위 퍼스트 무버(First Mover)라 불리는 이들입니다. 여기서 퍼스트 무버란 아직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지역에 가장 먼저 들어가 공간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업자 혹은 브랜드를 말합니다.
가로수길 초기에 들어온 편집숍과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바로 이 퍼스트 무버였습니다. 임대료가 쌀 때 들어와서 감각과 콘텐츠로 사람을 끌어 모았고, 그 결과 거리 전체의 가치를 끌어올렸습니다. 제가 직접 그 시절을 겪었는데, 매장마다 개성이 달라서 가로수길을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반나절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습니다. SNS를 타고 입소문이 퍼지면서 유동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건물주들은 임대료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업계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고 부릅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낙후 지역이 개발되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기존의 저소득층이나 소규모 창업자들이 밀려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가로수길은 이 교과서적인 사례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매출이 받쳐주는 동안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임대료 상승 속도가 매출 성장 속도를 훨씬 앞질렀습니다. 작은 브랜드들은 하나둘 떠나갔고, 그 빈자리를 유니클로, 자라, 스타벅스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가 채웠습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매장들이 들어서면서 가로수길만의 차별성은 사라졌습니다.
성수동은 이 구조를 한 단계 더 보여줍니다. 2015년 전후로 대림창고, 자그마치, 어니언 세 곳의 플레이어가 공장만 있던 성수에 사람을 불러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성수동은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 SBD, 즉 성수 비즈니스 디스트릭트로 불립니다. CBD(Central Business District, 중심 업무지구)나 GBD(강남), YBD(여의도)에 이은 서울의 네 번째 업무 중심지가 된 것입니다.
성수동이 가로수길과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 핵심은 토지의 용도지역(Use District)에 있습니다. 용도지역이란 토지를 어떤 목적으로 얼마나 크게 지을 수 있는지를 법적으로 정해 놓은 구분입니다. 가로수길 일대는 대부분 2종 또는 3종 일반주거지역으로, 단일 필지가 작고 근린생활시설로 들어갈 수 있는 최대 면적도 1,000제곱미터(약 300평) 수준에 불과합니다. 반면 성수동은 준공업지역으로, 건폐율 60%에 용적률 400%까지 가능하고 필지 자체도 공장 부지답게 넓습니다. 크래프톤, 무신사 같은 기업들이 대규모 사옥을 짓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2012~2013년 준공업지역 평당 2~3천만 원이었던 성수동 부동산은, 최근 실거래가 기준 4억 원대를 찍었습니다. 연무장길 기준 호가는 6억 원에 달한다는 말도 들립니다. 서울 주요 상업지구의 공시지가와 실거래 추이는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 시스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출처: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
제 경험상 이 구조를 이해하고 나면, 앞으로 어떤 지역이 뜰지 가늠하는 방법도 달라집니다. 이미 사람이 몰려있는 곳을 쫓아가는 게 아니라, 감각 있는 플레이어들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먼저 봐야 합니다. 흑백요리사 결선 출연자가 버티고개-약수역 사이에 건물을 매입했다거나, 유명 건축가가 장충동 성곽길 근처에 사업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릴 때, 그게 바로 다음 상권의 힌트가 됩니다.
가로수길의 이야기는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열광하는 상권 어딘가에서 똑같은 사이클이 조용히 진행 중입니다. 어떤 지역이 핫플레이스를 넘어 지속 가능한 상권이 되려면, 토지의 범용성과 용도지역이 받쳐주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감각 있는 플레이어의 행보를 따라다니는 것과 함께, 그 지역의 지적도를 한 번쯤 들여다보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부동산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