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꽤 오랫동안 "열심히 일하면 자연스럽게 올라간다"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 주변을 돌아보니, 5년이 넘도록 직급도 연봉도 제자리인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게 특별히 게으른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점이 더 충격이었습니다. 미국 직장인 4명 중 1명이 5년 이상 임금과 직급이 동시에 정체된 상태라는 연구 결과를 접하고, 저는 이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경력 초반이 평생 소득을 결정한다는 불편한 진실

일반적으로 "경력은 꾸준히 쌓으면 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버닝글라스연구소와 뉴욕대전문대학원이 130만 명의 중견 경력자를 분석한 결과, 커리어 중반에 정체를 경험한 사람들의 초기 10년 평균 임금 상승률은 30%에 그쳤습니다. 반면 지속적으로 성장한 그룹은 같은 기간 71%의 상승률을 기록했습니다(출처: 버닝글래스연구소). 두 배 넘는 격차가 10년 안에 이미 벌어지는 겁니다.
여기서 핵심 개념이 하나 등장합니다. 바로 경력 경로 의존성(Career Path Dependency)입니다. 경력 경로 의존성이란, 초기 커리어에서 쌓은 경험과 직무 역량이 이후의 선택지 범위를 좁히거나 넓히는 현상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초반에 어느 방향으로 첫발을 내딛느냐가 10년, 20년 뒤의 선택지를 사실상 결정해 버린다는 뜻입니다. 제가 직접 주변 사례들을 관찰해 보니, 이 현상은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한국 기업의 조직 구조는 여전히 피라미드형 위계를 유지하고 있어, 상위 직급으로 갈수록 자리가 급격히 줄어드는 구조입니다.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안정성을 택한 사람들이 10년쯤 지나면 승진이 막히는 구간에 부딪히는 걸 여러 번 봤습니다. 이게 미국 데이터와 겹쳐지는 순간, 이건 특정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노동시장 전반의 패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불편한 건 이직으로 돌파구를 찾는 경로마저 좁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니애폴리스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 of Minneapolis)의 분석에 따르면, 근로자가 외부 기업으로부터 더 높은 임금의 채용 제안을 받을 가능성이 1980년대 대비 절반 수준으로 줄었습니다(출처: 미니애폴리스 연방준비은행). 여기서 외부 채용 제안(Outside Offer)이란, 현재 재직 중인 직장이 아닌 다른 기업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이직을 권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에는 이걸 지렛대 삼아 현 직장에서도 연봉 협상이 가능했는데, 지금은 그 지렛대 자체가 사라지는 추세입니다.
경력 정체가 발생하는 구조적 흐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기업의 비용 효율화로 임금 상승 속도가 전반적으로 둔화
- 외부 채용 제안 감소로 개인의 협상력(Bargaining Power) 약화
- AI와 자동화로 인한 중간 숙련 직무(Middle-Skill Job)의 가치 하락
- 피라미드형 조직 구조에서 상위 직급 자리의 절대적 부족
이 네 가지가 동시에 맞물리면,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 자체가 성장을 막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저는 이걸 보면서 이걸 단순히 "노력이 부족한 개인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얼마나 현실을 단순화하는지 실감했습니다.
노동시장 재편 속에서 경력 정체를 피하는 현실적 전략

일반적으로 경력이 막히면 "이직하면 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판단으로는 그보다 더 정밀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연구에서 제시한 해법 중 저도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인접 직무 전환(Adjacent Role Transition)입니다. 인접 직무 전환이란 현재 직무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존 역량을 유지하면서 성장 가능성이 높은 연관 분야로 영역을 확장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사무직 관리자가 비즈니스 운영(Business Operations) 분야로 이동하거나, 경력이 정체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데이터 과학자(Data Scientist)로 전환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데이터 과학자란 대량의 데이터를 수집·분석하여 비즈니스 의사결정에 필요한 인사이트를 도출하는 직군으로, 현재 노동시장에서 수요가 가장 빠르게 늘고 있는 분야 중 하나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전환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것의 방향을 바꾸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여기에 AI의 등장이 변수를 하나 더 추가합니다. 생성형 AI(Generative AI)가 언어와 코드, 분석 보고서를 인간보다 빠르게 처리하게 되면서, 중간 수준의 지식 노동 가치가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있습니다. 생성형 AI란 텍스트, 이미지, 코드 등을 스스로 생성할 수 있는 인공지능 모델을 말하며, ChatGPT나 Claude 같은 서비스가 대표적입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이 도구들이 단순 리서치나 보고서 초안 작성 수준은 이미 신입 사원 이상의 속도로 처리합니다. 이게 뜻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앞으로 살아남는 직군은 AI를 쓸 줄 아는 사람이지, AI가 대체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구진이 강조한 또 하나의 포인트는 소프트 스킬(Soft Skill)의 중요성이었습니다. 소프트 스킬이란 대중 연설, 시간 관리, 네트워크 구축처럼 기술이나 자격증으로 정량화하기 어려운 대인 관계 및 조직 운영 역량을 말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자격증이나 기술 역량보다 관계를 형성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능력이 경력 정체를 막는 데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이 영역만큼은 대체하기가 여전히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경력 개발 또는 재무 계획 조언이 아닙니다. 개인의 상황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참고 자료로만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경력 정체는 결코 의지나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조가 만들어낸 함정에 가깝습니다. 다만 그 구조를 인식하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이직을 생각하기보다, 제가 가진 역량이 어느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먼저 그려보는 것이 현실적인 첫걸음이 될 것 같습니다. 시간이 아니라 전략이 경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이미 왔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