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가가 내려갔다는 뉴스를 보고 안도했다가, 정작 중요한 숫자가 오히려 올랐다는 걸 나중에야 알아챈 적 있으십니까. 저는 독일의 5월 소비자물가 지표를 처음 봤을 때 딱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전년 대비 2.6%, 전월 대비 -0.2%. 숫자만 보면 분명히 좋아지는 것 같은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물가가 내렸다는 착시, 직접 뜯어보니 달랐습니다
이번 독일 물가 둔화의 핵심 원인은 두 가지입니다. 국제유가 하락과 독일 정부의 유류세 인하 조치. 에너지 가격 상승률이 지난달 10.1%에서 이번 달 6.6%로 크게 낮아졌고, 식료품 물가도 1.2%에서 0.4%로 꺾였습니다. 수치만 놓고 보면 인플레이션이 잡혀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지표를 뜯어보니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유류세 인하는 물가를 구조적으로 낮춘 게 아니라, 단기적으로 상승 시점을 미룬 것에 가깝습니다. 독일중앙은행(분데스방크)의 추산에 따르면 이번 유류세 감면으로 인한 물가 하락 효과는 약 0.25%포인트(p)에 불과합니다(출처: 분데스방크). 정책 효과가 소멸되는 순간, 수치는 다시 튀어오를 수 있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런 식의 헤드라인 CPI 수치를 보고 "물가가 잡혔다"고 결론 내리는 시각이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헤드라인 CPI(소비자물가지수)란 에너지와 식료품을 포함한 전체 소비자물가 변동을 측정하는 지표로, 외부 충격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국제유가 한 번만 출렁여도 숫자가 확 달라지기 때문에 경기의 실제 체력을 보여주는 지표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근원 물가가 오른 것, 이게 진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어디를 봐야 할까요. 저는 이번에도 근원 물가(Core CPI)에 시선이 갔습니다. 근원 물가란 에너지와 식료품처럼 가격 변동이 큰 항목을 제외하고 측정한 물가 지표로, 경제의 기초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을 보여준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번 독일 5월 수치는 전월 2.3%에서 2.5%로 오히려 올랐습니다. 헤드라인은 내려갔는데 근원은 올라간 것입니다.
제 경험상 이 두 지표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때가 가장 골치 아픈 국면입니다. 겉으로는 안정되어 보이지만, 속에서는 인플레이션 불씨가 계속 타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번 경우는 서비스 가격 상승과 임금 인상이 근원 물가를 밀어올리고 있다는 점에서 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바로 전문가들이 경고하는 2차 인플레이션 효과(Second-round effect)입니다. 쉽게 말해, 처음에는 에너지나 원자재 공급 충격에서 시작된 물가 상승이 시간이 지나면서 임금 인상, 서비스 요금 인상으로 번져나가는 현상입니다. 한 번 이 단계에 접어들면 중앙은행이 금리를 쉽게 내릴 수 없게 됩니다.
유로존 주요국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보면 프랑스 2.8%, 이탈리아 3.3%, 스페인 3.6%로, ECB의 중기 목표치인 2.0%를 모두 웃돌고 있습니다(출처: 유럽중앙은행). 유로존 전체가 목표치 위에 걸려 있는 상황인 셈입니다.
이번 지표를 보고 "긴축이 끝나가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을 갖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해석이 조금 성급하다고 생각합니다. 근원 물가가 오른 이상, ECB 입장에서 금리 인하 카드를 꺼내기는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입니다.
ECB 금리 인상이 원화 환율에 미치는 경로

이제 한국에 사는 저한테 직접 닿는 이야기를 해봐야겠습니다. ECB가 금리를 올리면 유럽 이야기로 끝날 것 같지만, 실제로 겪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글로벌 금리 수준이 전반적으로 올라가면 신흥국 통화가 먼저 흔들립니다. 원화가 대표적입니다.
원화는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위험자산 성격이 강한 통화로 분류됩니다. 긴축 기조가 강해지거나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질 때 투자자들이 안전자산인 달러로 자금을 이동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원화가 약세 압력을 받는 구조입니다.
구체적인 경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ECB 금리 인상 → 글로벌 유동성 축소 → 신흥국 자금 이탈
- 지정학적 리스크(중동 분쟁 장기화) → 안전자산 선호 강화 → 달러 강세
- 에너지 가격 재상승 가능성 → 한국 무역수지 악화 → 원·달러 환율 상승 압력
이 세 가지 경로가 동시에 작동하면 원·달러 환율이 올라가는 방향으로 힘이 쏠립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유럽 물가 지표 하나가 이렇게 긴 파급 경로를 통해 우리 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처음 들여다봤을 때는 꽤 당황스러웠습니다.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라는 단어도 여기서 다시 등장합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이란 경기 침체(stagnation)와 물가 상승(inflation)이 동시에 나타나는 상태로, 중앙은행이 경기를 살리기 위해 금리를 낮추고 싶어도 물가 때문에 그럴 수 없는 최악의 딜레마를 뜻합니다. 제 경험상 이 국면에서는 시장이 어느 방향으로도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답답한 흐름이 이어집니다.
현재 ECB는 지난달 금리를 동결했지만, 4월 회의록에서 상당수 위원이 "동결은 아슬아슬한 결정이었다"고 밝힌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다음 달 6월 11일 회의에서 금리 인상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지배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단순히 물가가 내려갔다는 헤드라인 수치에 안도하기보다는, 근원 물가 방향과 ECB 정책 신호를 함께 읽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글로벌 금리 사이클이 어느 방향으로 기울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환율과 자산 시장을 판단하는 데 훨씬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것, 직접 지표를 들여다보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금융·투자 조언이 아닙니다.